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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빈이 소식(4) - 이 아이를 어찌할 것인가?
출근 길에 정빈이 할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할머니, 저예요. 속 많이 상하시죠. 오죽하면 할머니가 정빈이더러 나가라고 했겠어요?" "일단 며칠만 기다려 보세요. 선생님이 호되게 나무라고 매를 좀 때려 준다고 했으니까. 그 후에 애가 어찌 나오나 좀 보면서 다시 의논합시다." 지난 겨울방학 때는 예습까지 하면서 착실하게 학원을 다니던 녀석이 2월 봄방학 무렵부터 뭔가 뒤틀리기 시작하더니만 급기야는 학원을 가지 않겠다고 하고 학교도 몇번 빠졌다. 내가 전화를 해도 도통 받지를 않는다. 작은 어머니는 애가 자꾸 거짓말을 하고, 돈만 있으면 당일로 다 써버린다고 한숨이다. 나도 어찌해야 할 지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이 놈 마음을 잡아줄 수 있는지. 지난 겨울방학 때 부실한 영어 실력을 보충해 줄 적당한 선생님을 찾아봤는데 쉽지 않았다. 급기야 내가 영어를 가르치기로 했다. 내가 보탤 수 있는 시간에 한계가 있고, 또 영어 공부란 것이 외우면 그만이니 2학년 교과서 본문을 통째로 외우라고 했다. 잘 해 보라고 격려금도 주고, 공부하는 요령도 가르치고. 돼지고기, 고등어 따위의 반찬거리를 사 나르기도 하고. 지방에 출장다녀 오는 길에 밤이 늦어서도 찾아가고, 출근길에 들러 보기도 하면서 이번 겨울에 그동안 뒤쳐진 성적을 만회해 보자고 졸라 댔었다. 두달간 10여차레 정빈이 집을 찾아 갔었다. 어느 날은 중학 동창 친구네 칠순 잔치에 데리고 갔더니 잔치에 참석한 몇 친구가 정빈이에게 용돈을 쥐여 준다. 우리 가족들이랑 패밀리레스토랑에 데리고 가서 밥을 먹인 후, 용산박물관에 데리고 가서 두어시간 해설을 해가며 흥을 돋아 준 날도 있었다. 12월과 1월은 서로 잘 지냈다. 정빈이가 2학년 영어 교과서 본문도 3단원이나 외웠다. 그런데 어느날부터인가 애가 옆길로 슬슬 새기 시작하는데 환장할 노릇이었다. 정빈이 이놈이 자꾸 내 전화를 피하고, 뭐라고 하면 말을 돌린다. 어느 날은 열받은 내가 중곡동에 있는 이모집으로 찾아가기도 했고, 화를 내 보다가, 달래 보다가...... 그래봐야 상황이 호전되지 않는다. 애가 아무 생각이 없다. 목표도 없고 흥미도 없다. 대화를 해 보려 하면 그냥 무성의하게, 아무렇게나 대답한다. 나에게만 그런게 아니라, 지 주변의 모두에게 그런 자세다. 밤 늦게까지 쏘다니다가 늦게 들어온다. 애가 삶의 끈을 놓아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왜 이러는지 속을 알 수가 없다. 정말 미치겠다. 애를 데리고 사시는 할머니는 징징징 울어 대신다. 민망스럽게도 자식 친구인 나더러 선생님이라고 부르시는데 "선상님, 내가 전생에 뭔 죄를 져서 가슴에 묻은 자식새끼가 남긴 저 징헌 놈헌테 이렇게도 속을 끓고 사는지 모르겄소. 그남둥 선상님 붙들고 내 하소연이나 해보요." 급기야 하소연이 아예 통곡으로 변했다. 할머니 속도 알만 하다. 무책임하게 집나간 며느리는 얼마나 미울 것이며, 이웃에 살면서 철없는 놈 치닥거리하는 작은 며느리 보는 일은 또 얼마나 민망한 노릇인가? 가슴에 치미는 화를 퍼부을 데도 없으실 것이다. 전화기를 붙들고 한없이 흐느끼는 통에 내 가슴도 무너져 내린다. "할머니 맘 고쳐 잡수씨요. 우리가 옆에서 챙겨 볼랑게 너무 상심 마세요. 정빈이 저도 사람잉게 철 들겄지요. 이번에 선생님에게 호되게 혼나고 나면 한번 잘 달래 보게요." 출근 길에 차안에서 전화를 거는 맘이 심란하다. 어제는 정빈이 어머니와 통화를 했다. 그간 못마땅해서 전화번호조차 알려고 하지 않았으나 어쩔 수 없이 정빈이 이모에게 번호를 물었다. "정빈이 엄마, 제발 책임감있게 좀 행동해 주세요. 절대로 직접 돈 주지 마세요. 돈 때문에 애가 망가져요." 그러면서 속으로는 쉴새없이 투덜거린다. "씨팔, 내가 뭔데 애 엄마에게 이따위 훈계를 하는거야." 정말 웃기는 시츄에이션이다. 담임선생님과 의논한 결과 선생님이 사랑의 몽둥이를 들기로 했다. 작은 어머니와도 걱정스럽게 정빈이 상황을 의논하고, 다시 학원 선생님에게 전화해서 정빈이 학원 생활을 상세히 보고해 달라고 주문해 두었다. 날마다 골치가 지끈거린다. 어디에 숨어 있던 인연이 내 앞으로 다가와 이녀석과 이리 엉켜 가고 있는지..... 그러나 어쩔 것인가? 이 어린 놈의 마음에 의지할 자리 하나를 만들어 줘야지, 여기서 애가 무너져 버리면 길고 긴 애의 앞날이 어찌될 것 인가? 애가 지난 몇개월간 정말로 나를 따르던 기억이 새롭다. 며칠 전에는 나도 신경질이 쳐 올라서 그 녀석에게 악을 바락바락 쓴 적이 있지만 "애를 따뜻하게 보듬어야 한다."고 새롭게 다짐한다. '하느님, 부처님, 공자님, 천지신명님!!!!!! 우리 정빈이 마음 좀 가라 앉혀 주세요. 지금부터 마음잡고 공부 좀 챙겨서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알로이시오전자공고에 들어가게 해 주소서. 장차 제대로 된 건강한 젊은이로 자라날 수 있도록 가피를 내려 주소서.' 정말, 간절히 원한다. 내가 두달 쯤 후에는 "돌아온 정빈이!"라는 보고서를 올릴 수 있기를..... 매월 후원금을 보내주고 있는 친구들에게 이런 한심한 보고서를 올리게 되어 미안하다. 태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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