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작성자 김훈종 ㆍ작성일 2007-08-25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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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21세기형 인재 처음 방송 일을 시작한 건 1980년대 중반 청소년 심야 프로그램 ‘별이 빛나는 밤에’였다. 초보 주제에 생방송 직전에 도착해 원고를 쓰기도 했고, 이성복의 시 ‘정든 유곽에서’나 ‘애첩 팔아 부채 산다’는 속담을 버젓이 인용하기도 했다. 담당 PD는 “제정신이냐?”고 야단치면서도 재미있어 했다. 시인이라고 봐주는 거였다. 그들 자신이 다 ‘문청’이었으니까. 그러나 얼마 안 가 시는 모두가 불편해하는 예술이 됐다. 라디오의 단골 코너였던 시 소개 코너들도 자취를 감췄다. 나에게 시의 위기는 그렇게 문단에서보다 일터인 방송국에서 먼저 닥쳐 왔다. 그럼에도 봄가을 두 번씩의 개편 바람을 40번 넘게 지켜내 준 것은 전적으로 시라는 ‘기초의 힘’ 덕분이었다고 믿는다. 사실 방송 일만이 아니다. 시 공부나 시집 읽기는 어떤 인문·문화·예술분야 일에든 탄탄한 기초가 된다고 확신한다. 죽어 가는 시의 회생에 도움이 되려고 하는 말이 아니다. 고려시대 사대부층이 어려운 한문 단어를 나열하면서 자기들끼리만 즐기던 경기체가는 평민의식의 성장과 함께 바로 퇴출당했다. 현대시? 이것도 퇴출당해야 하면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게 내 예술관이다. 그럼에도 왜 영어 공부 시간도 모자랄 젊은이들에게 한가하게 시 공부 타령인가. 시야말로 21세기형 인재를 위한 가장 저렴하면서도 순수한 최고의 교재이기 때문이다. 첫째, 창의성이다. 영국의 대표적 시인들인 워즈워스와 콜리지는 좋은 시를 ‘평범한 것에 이상한 맛을 부여하거나, 경이적인 것을 평범한 것으로 고치는 것’이라 정의했다. 시로부터 가장 크게 배울 수 있는 게 바로 창의성이다. 한 마리 곤충인 거미로부터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김수영)라는 갈망의 설움을 이끌어 내는 독창적인 시들을 꾸준히 따라 가다 보면 창의성은 저절로 체득된다. 둘째는 말귀. 사실 시는 어렵다. 사람들이 시를 멀리하게 된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때론 직장 상사의 지시나 처사가 더 난해하지 않은가. 아니 인생 자체가 “조심하세요. 경기도에서 버스를 타면 낙타 시장으로 갈지도 몰라요”(박상순)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는 해독 불가 그 자체이기도 하다. 난해 시를 독파하고 나면 세상에 알아듣지 못할 말이 없다. 말귀가 빠르면 일은 훨씬 잘하게 돼 있다. 총명(聰明)하다는 말은 원래 말귀가 빠르다는 뜻이다. 셋째, 폴 레이라는 사회학자는 『세상을 바꾸는 문화창조자들』이란 책에서 새로운 시대의 기린아가 될 문화창조자들이 조용히 물밑에서 태동 중이라고 진단했다. 그리고 그런 예비 기린아들의 특징으로 직관적인 삶에의 열망을 꼽았다. 시야말로 논리가 아닌 직관의 예술이다. 시집들 빨리 많이 읽어 그 대열에 동참할 일이다. 마지막으로 감성. 21세기는 감성마케팅·감성경영이 대세인 시대다. “저녁 별 돋을 때까지/ 발에 묻히고 온 흙/이 흙들이/오늘 내 저녁 식량입니다”(이준관). 전통적으로 시로부터 가장 쉽게 배울 수 있는 게 감성 자극과 회복 아닌가. 쓰고 보니 시를 너무 속된 성공처세의 도구로 만든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러잖아도 얼마 전 인터넷에 정식 등단한 시인들한테는 논술학원에서 보수를 얼마쯤 더 준다는 글이 올랐다. 그러자 시인이 속되게 논술선생이라니, 비난 댓글이 꽤 많았다. 그럼 시인은 이슬만 먹고 사느냐는 댓글도 있긴 했다. 사르트르는 시인을 지는 것으로 이기는 존재라고 했다. 동의한다. 시인과 시는 처세 성공법 같은 것과는 비켜서 있어야 한다. 하지만 한쪽에선 방송작가든 무슨 일이든 일을 열망하는 젊은이들이 넘친다. 다른 한쪽에선 작가를 찾는 방송 PD들이 넘친다. 그런데 막상 둘을 소개해 주면 일이 잘 성사되지 않는다. 시와 방송 양쪽으로부터 20년 넘게 덕을 보거나, 혹은 폐를 끼친 입장에서 보다 못해 방법 하나쯤 조언하는 게 그렇게도 속된 일일까. 김경미 시인·방송작가 [삶과문화] 시와 21세기형 인재 [중앙일보]

김상순 2009-05-10 04:21	촘촘히 읽어 보니, 다시 생각이 깊어지는 지적들이 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