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 동창·동문회 바람

“떡판!” “넙치!” 두 친구가 술집에서 마주쳤다. 별명을 부르는 이들의 얼굴에는 반가움이 넘친다. 점잖은 옷차림에 넥타이를 맸지만 어릴 적 친구를 만나면 저절로 개구쟁이가 된다. 한 주류회사의 광고 장면이다.

오랜 친구란 험한 세상을 견뎌내는 비빌 언덕이자 피난처다. 안타깝게도 나이 먹을수록 그들을 만나기가 어렵다. 하는 일도 사는 곳도 천차 만별인 탓이다. 연락조차 힘든 친구들을 쉽게 만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부산의 한 해운회사에서 일하는 김태수(31)씨는 지난 6일 인터넷에 작은 집을 지어 친구들을 초대하고 있다(members.tripod.co.kr/~sarimbh). 군복무 뒤 어려웠던 대학시절 힘이 돼주었던 복학생 친구들을 만나고 싶어서다. “그 친구들이 없었다면 대학생활을 어떻게 했을지 모르겠어요.” 복학했던 91년, 학교 앞 거리는 몰라볼 정도로 달라져 있었고, 신세대 후배들과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때 연세대 사회과학대 87·88학번 친구 10여명이 단과대 건물 1층 어두운 구석방에 ‘사림 복협’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모여 서로 의지할 언덕이 돼주었다. 그러나 졸업은 그들을 흐트려 놓았다.

김씨는 당시의 지저분했지만 정겨웠던 동아리방을 떠올리며 요즘 유행하는 사이버 커뮤니티(공동체)를 만든 것이다. “게시판에 올라온 글을 보면 옛날 동아리 방의 `날적이'(공동일기장)를 다시 보는 듯 해요. 소식 전하기가 전보다 편해진 것은 물론이고요. 한겨울 친구들 체온으로 동아리방을 데웠던 것처럼 이방도 따뜻해질 겁니다.”

인터넷에 때아닌 동창·동문회 바람이 불고 있다. 지난 1월 서비스를 시작한 커뮤니티 서비스 전문사이트인 프리챌(http://www.freechal.com/)에 입주한 사이버 모임 2만여개 가운데 동문·동창회 등 학교·학원 따위를 매개로 한 것이 4천여개에 이른다. 각종 모임 가운데 단연 1위다. 모교사랑(http://www.iloveschool.net/)처럼 동창회 서비스만을 전문으로 하는 중소규모의 사이트도 30여곳을 넘어섰다.

가족 만큼이나 끈끈한 정서적 유대를 특징으로 하는 동문·동창회가 인터넷에 번창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꼽을 수 있는 게 컴퓨터·인터넷의 보편화 추세다. 컴퓨터 보급률은 50%를 훌쩍 뛰어넘었고, 인터넷 이용자 수도 1천만명을 넘어섰다. 특별한 사람만 인터넷을 하던 때는 지난 셈이다. 험한 세상 살아가며 옛 벗이 그리운 이들이 어디로든 뚫려 있는 인터넷을 이용해 곳곳에 흩어져 있는 친구들을 찾는다. 이른바 가상공동체가 서로 모르는 이용자들이 온라인상에서 만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라면, 인터넷 동창회 등은 현실공간에서 이미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이 온라인 속에 둥지를 틀었다는 점에서 다르다. 지난 가을 대학 동기들만의 홈페이지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는 박문태(32·삼성에스디에스 사내시스템 담당)씨는 “졸업 뒤 서로 바빠 정식 동기모임을 한번도 열지 못했는데, 홈페이지 개설 뒤 한달에 100여건의 이야기를 주고받을 만큼 만남이 활발해졌다”고 말했다.

정서적 유대라는 1차적 관계를 토대로 하는 만큼 젊은이들만 그런 것은 아니다. 98년 4월 문을 연 광주일고 51회 동문회 사이트의 주역은 마흔줄의 `고령자'들이다(ilgo.nara.cc). 본래 이 사이트는 해마다 기별로 돌아가며 주최하던 총동창회 체육대회를 51회가 맡게 되자 연락의 편의를 위해 임시방편으로 만든 것이다. 시도는 성공적이어서 그해 10월 체육대회에 350여명의 재경동문 가운데 120명이 함께 광주로 내려갔고 해외에서도 4명의 친구들이 찾아왔다. 동문회 총무인 서경석(43)씨는 “방명록에는 고등학교 때처럼 일체의 존칭이 생략된 정겨운 글들이 한달에 10건 이상 올라온다”며 “인터넷이 동문들을 잇는 다리 구실을 해내고 있다”고 말했다.

회원 확보에 여념이 없는 인터넷 서비스 업체들이 이런 변화의 기류를 놓칠 리 없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네띠앙, 다음, 드림위즈, 라이코스 등이 ‘커뮤니티 포탈’ 경쟁을 뜨겁게 펼치며 각종 사이버 모임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네띠앙의 길윤웅 서비스운영실장은 “이용자들을 사이트에 묶어 두려는 업체의 의도와 외로움을 떨치려는 네티즌들의 요구가 맞아 떨어져 커뮤니티 바람이 불고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집에서 새는 바가지는 바깥에서도 새는 법. 학연·지연 등 현실공간의 부정적인 연줄망이 강화되는 양상도 나타나고 있다. 운영상의 이유에서 비롯된 측면도 있지만 많은 온라인 동창회들이 이용에 제한을 두는 등 인터넷의 기본정신이라 할 개방성보다는 폐쇄성을 보이고 있다. 어떤 사이버클럽은 30만~50만원의 연회비에 가입조건으로 졸업증명서와 재직증명서를 받고 심사기간을 거친다. 이 홈페이지에는 “자신의 경력 관리에 소홀함이 없는 인재들이 탑 클래스 비즈니스맨으로 커나갈 수 있도록 `인재 커뮤니티'를 건설합니다”고 적혀 있다.

이제훈 안창현 기자blu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