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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현스님, 마라톤 다녀왔습니다.
제현스님, 그간 여일하셨는지요? 어제는 동아마라톤에 나가 달리고 왔습니다. 마라톤 풀코스를 달린 후의 다리치고는 그래도 상태가 그만그만 합니다. 계단을 내려갈 때를 제외하고는 걷는데 별 불편이 없으니까요. 다음달 중순에 보스톤 마라톤 대회에 출전하기 위한 점검이기도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대회중의 하나이고, 서울시내를 관통하는 유일한 대회라는 점에서 저는 다소 비장한 마음으로 이번 대회를 준비했습니다. 이 대회를 위해서 대략 400Km정도의 로드웍을 했으니까 준비는 좋았던 것 같습니다. 지난 평창동에서 모임에 참여하기 위해 산악 구보를 3시간 쯤 한 것, 선운사 도솔암에서 이천배쯤 했던 참배, 눈보라가 휘날리던 한강변에서 4시간 연속 달리기, 그리고 술이 덜깬 몸을 달래가며 새벽마다 어둠을 뚫고 한시간씩 했던 연습들.... 이 모든 것이 동아마라톤을 위한 준비였었던 바, 저로서는 한번 해보겠다는 생각이 뚜렷했었습니다. 대회 당일날 부모님과 제 처가 응원을 나왔습니다. 저는 제가 통과할 전철역에 몇시 몇분쯤 나와야 할지 미리 알려 주었습니다. 오늘의 목표시간은 3시간 19분대, 지난 번에 어렵게 3시간 20분대에 진입했으니 이 정도에 만족하기로 했습니다. 3월 15일 아침 8시에 세종로의 이순신 장군 동상 앞에서 출발 총성이 울렸습니다. 전국에서 모여든 건각 1만 5천명이 함성과 함께 일정한 흐름을 만들면서 남대문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선수들이 발에 치이기는 했지만 남대문을 돌아 동대문운동장으로, 다시 보신각까지 오자 이제 저에게 맞는 스피드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대략 시속 13Km로 내달리는데 맞추어 신설동을 지나 답십리, 그리고 어린이대공원을 통과했습니다. 시민들이 열렬히 응원을 해 주고 있었지만 그 소리가 전혀 귀에 들어 오지 아니하였습니다. 나는 오로지 편한 자세로 가장 에너지 소비를 작게 하면서 뛰는 자세만 생각했습니다. 하프지점을 나타내는 잠실대교 위를 1시간 35분대에 주파했습니다. 이건 다분히 오버페이스였습니다만, 제 다리의 탱탱함이나 안정적인 호흡상태를 감안할 때 한번 해 볼 수 있다는 생각은 들었습니다. 그러나 자만하면 절대 안되는 것이 마라톤 레이스입니다. 35Km 이후 그 악마같은 고통이 어떤 식으로 나를 괴롭힐 지 심히 두렵고 궁금했습니다. 반환점을 통과한 이후에 나는 과감히 속도를 늦추었습니다. 이제부터는 단전에서 느껴지는 호흡에만 신경을 쓰기로 했습니다. 제현스님에게서 호흡에 대해서 귀동냥을 한 것하고, 최근에 읽은 <송기원>의 참선.구도에 관한 소설 속에서의 단전호흡법을 연상하며 뛰었습니다. 온 몸에 모든 힘을 빼고 단전을 통해 느껴지는 날숨과 들숨에만 신경을 모았습니다. 땡초보가 그런 식으로 호흡을 한다고 무슨 효과가 있겠습니까만, 단전호흡이 되건 말건 몸은 가뿐하고 마음도 편했습니다. 잠실역,천호사거리를 지나 30Km를 통과하면서 다리가 약간 무거워지는 듯 했지만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35Km에 도달하면 일전을 벌일 생각이었지요. 드디어 가락시장을 지나면서 35Km를 통과하자 서서히 고통이 찾아왔습니다. 대신에 온 몸에서 수분이 빠져나가면서 정신이 아주 명료해 졌습니다. 온갖 산만한 정신이 하나로 모아지는 듯 했습니다. 우리가 잠자지 않는 한 정신활동은 계속됩니다. 그러나 그중 쓸만한,나를 만족시킬 만한, 그리고 정말 나 스스로에게 솔직한 생각이 얼마나 있을까요? 나는 물었습니다. "너는 누군데 너에게 솔직해지자고 그러냐?" 달리는 도중이라 생각이 집중되지 않은 측면도 있었지만, 그런 식으로 마구잡이로 묻고 대답을 거듭해 봐야 너무나 다양한 나의 어떤 부분이 진짜 나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습니다. "내가 누구든 말든 그 따위 비생산적인 생각 때려 치워라." 대신에 "너는 지금 뭐가 제일 불만이고, 뭐가 가장 간절히 필요하냐? 솔직히 말해라." 갑자기 가슴이 욱하고 올라왔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제 아내는 시댁 식구들과 좀 불편하게 지냅니다. 그런데 그 때문에 제가 아내를 구박했던 것이 아프게 찔러 왔습니다. 그동안 내가 비열하게 야곰야곰 아내를 냉대하거니 적당히 무시해 버린데서 아내가 얼마나 고통받았을지, 또 그 때문에 사실은 내가 얼마나 질곡에 묶인 삶을 살고 있는지 상황이 선연해졌습니다. 진실로 참회했습니다. 바보같은 내 처신 때문에 아내가 당한 고통에 대해 너무나 미안했습니다. 아내도 만족시키지 못하면서 "나와 남은 본시 하나이니 내 것을 헐어 어려운 이웃에게 보시와 적선을 하여 덕을 쌓자."는 지론이 얼마나 허구에 가득찬 것인지 새삼 부끄러웠습니다. "그래, 스님 말씀대로 모든 것을 내려 놓자. 그러면 결혼식날 주례앞에서 사랑을 맹세했던 당시의 초심으로 돌아갈 것인 즉, 모든 아내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리자." 다리가 가라앉고, 호흡이 턱을 칠듯이 가빠지면서 망연하고 아득하게 남은 나머지 거리를 계산하던 그 절명의 순간에 나는 완전히 벌거벗고 참담하게 부끄러운 나를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또 하나의 나인 아내를 섬기고 챙기는 일이 지금 이 순간의 결심 하나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을 물론 잘 압니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달리는 일이 오로지 아내를 위한 고행길이고, 결심을 다지기 위한 참선 수련이라고 여기면서 다리에 힘을 주었습니다. 그렇게 마구잡이로 내달리기를 3Km쯤하고 나니 속이 후련해졌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2Km를 남기고는 그야말로 진이 다 빠져버린 것 같았습니다. 도대체가 몸이 앞으로 나가지를 못하고 제자리걸음을 하는듯 합니다. 지치고 힘든 걸음을 옮겨 가면서 이 한걸음 한걸음에 아내를 위하겠다는 내 결심이 박히라고 주문을 외웠습니다. 마침내 결승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마지막 스퍼트를 하면서 결승점을 통과하던 순간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그저 여기에 내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3시간 17분 04초! 종전 기록을 9분 52초 갱신했습니다. 오늘의 내가 있게 해준 모든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사무칩니다. 부모님, 내 아내 이경희, 자식들, 친구들.... 무엇보다도 부처님의 가피, 그리고 제현스님과 우리 도반들.... 나무관세음보살, 이 글을 씀으로써 또 다른 相을 지어버렸습니다. 스님은 相을 지으면 業이 된다고 하셨는데..... 스님, 이 불쌍한 중생의 免業을 위해서 기도해주십시오. 나무아비타불()()() 검불 올림  위운량: 3시간 17분 04초! 나로서는 꿈의 기록일세. 열심히 하는 회장님께 경의를... 난 최근에 건강이 좋지않아 과로를 금하라는 의사선생님의 권유에 따라 모든 운동을 자제하고 있는 중이므로 더더욱 꿈의 기록일 밖에. 앞으로는 나이를 감안하여 기록보다는 즐기는 마라톤으로..... -[03/18-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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