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원장님 같은 분 아니면 움직이기도 불편한 노인네들이 무슨 힘으로 읍내까지 걸어가 치료받겠어?”

19일 오후 2시께 함평군 나산면 우치리 신촌마을 김철수(81)·정해남(여·77)씨 부부가 사는 집에 진찰가방과 청진기를 든 조기창(57) 원장이 왕진을 위해 들어섰다. 함평군 해보면에서 조그마한 자애의원을 운영하고 있는 조 원장에게 5년 전 중풍으로 쓰러져 오른손과 다리가 불편한 정 할머니를 돌보던 김 할아버지의 전화가 걸려왔기 때문이다.

청진기로 상태를 살펴본 조 원장은 정 할머니에게 “그렇게 찬바람 쐬지 말라니깐 말을 안들어요. 요새 팔 다리 운동은 하고 지내세요?”라며 ‘꾸지람’을 했다. 평소 건강을 각별하게 챙기라는 자신의 당부를 잊은데 대한 애교 섞인 질책이었다.

하지만 조 원장은 이내 정 할머니의 팔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사를 놔준 후, “어르신 천식은 괜찮으시냐”라며 김 할아버지의 상태를 살폈다.

무뚝뚝한 얼굴이지만 금세 환자들과 친근하게 말벗이 되어주는 조 원장. 그는 함평군 해보면과 나산면 일대에서 ‘시골 의사’로 통한다.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의 전화를 받으면 단숨에 왕진가방을 챙긴다.

그는 취미로 배운 사물놀이로 노인들을 찾아가 즉석 공연을 펼치는 ‘괴짜 의사 선생님’으로도 불린다. 매주 한차례 노인복지 시설에 찾아가 난타공연을 한 것이 벌써 10년째다.

홀로 계신 어르신들을 만나려는 의도로 사물놀이를 배웠지만, 환자들의 가정사까지 꿰뚫고 있는 ‘가족 주치의’가 됐다.

조선대 의대를 졸업한 그는 지난 1990년 함평군 해보면에 병원을 개원했다. 일면식도 없는 그가 해보면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그 곳 보건지소에 근무하던 대학후배가 “여기 좋아요”라며 걸어온 전화 한 통이 계기가 됐다. 젊은 나이에 무슨 일이든 해보자며 무작정 병원을 열었다. 그리고 우연히 청진기를 들고 아는 형님의 어머니를 진료해주면서부터 왕진을 멈추지 않고 있다.

오전 7시부터 찾아와 병원문을 두드리는 어르신들을 치료하고, 왕진 요청이 있으면 시간을 쪼개 환자를 찾아갔다. 초창기 택시를 타고 동네 곳곳을 다녔던 조원장은 이제 촌로들의 ‘콜’을 받는 즉시 승용차를 몰고 왕진에 나선다.

처음에는 1주일에 1∼2차례, 많을 때는 10여 차례까지 이어졌다. 왕진에 따른 추가 비용은 별도로 받지 않는다. 그가 병원을 비웠다고 나무라는 손님도 없다. 주변 사람들은 그의 ‘부재 이유’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병원에서 그냥 기다린다.

20여년 동안 동네 곳곳을 다니다 보니 이제는 집집마다 숟가락 숫자에서부터 자식들 소식까지 훤히 꿰고 있다. 그리고 누가 어떤 고민을 안고 있는 것까지….

“한번은 매일 술취해서 다니는 사람이 있었는데, 안 좋게만 봤어요. 그런데 어느 날 집에 와달라는 전화를 받고 가봤더니, 이해가 되더군요. 큰아들이 근무력증으로 눈을 감았는데, 작은아들까지 같은 병으로 누워 지내니 술이라도 마시고 싶었던 것이지요.”

요즘 시골에 사람이 없다지만 그래도 그는 여전히 1주일에 3∼4차례는 왕진을 다닌다. 복지시설에서는 무료로 어르신들의 상태를 봐드리기도 한다. 연말에는 소박하지만 동네 어려운 이웃들에게 김치와 쌀을 선물하기도 한다. 그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시골의사로 계속 살 생각이다.

“교사가 꿈이었는데, 목수셨던 아버지가 의사가 되라고 하셨던 이유를 이제야 깨닫고 살고 있는 셈이지요. 농촌에서 왕진다니는 게 힘들지는 않아요. 단지 생각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의 문제일 뿐이지요.”

/김경인기자 kki@kwangju.co.kr

/서부취재본부=황운학기자 hw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