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예술/인문/사회

 

 

 

작성자 김태룡
작성일 2005-04-30 (토)
ㆍ추천: 0  ㆍ조회: 4833   
정여립 사건의 진상
          대동세상 꿈꾼 혁명아 정여립


                                                                   출처: 양돈타임스 김봉진의 우리 역사이야기

인생천지간에 누구나 천자가 될 수 있다며 왕권 세습 독점 비판

호남평야의 넓은 들을 바라보면서 그 중심 도시인 전주를 거쳐 동쪽으로 가다보면 진안군에 들어서고 마이산이 보인다. 그 건너 무주 쪽으로는 멀리 우뚝 솟아오른 덕유산(높이 1614m)이 보인다. 마이산을 거쳐 무주와 장수의 중간 길로 접어들어 가다보면 가끔씩 화살표로 표시해놓은 안내판에 ‘죽도’라는 지명이 보인다. 그 길을 따라 가다보면 긴 다리를 지나게 되는데 거기서부터 죽도(전북 진안군 상천면 수동리 내동마을)에 해당된다.

지금은 물로 둘러싸인 죽도라는 섬이 되어버렸지만 그곳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섬이 아니었다. 예전부터 섬의 뜻을 가진 죽도라는 지명으로 불려 왔는데 최근에 용담댐이 완공되면서 본래 이름처럼 물에 둘러싸인 육지 속의 섬이 됐다. 긴 다리를 건너 죽도에 들어서서 조금 더 가다보면 저 멀리 천반산(높이 647m)이 보인다. 죽도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천반산은 조선 중기에 역모 혐의를 받고 자결했던 정여립과 관계가 깊은 산이다. 지금 그 산 아래로는 무심한 듯 강물이 흘러가고 있고 그 사이로 울긋불긋한 깃발과 함께 휴양객을 유혹하는 민박집과 음식점들이 자리 잡고 있지만, 한때 이곳은 새로운 세상 건설을 꿈꾸며 젊음을 불태웠던 젊은이들이 모여 공부하고 무술 수련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자신을 따르던 무리들을 모아 대동계를 결성하고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꿈을 꾼 인물, 정여립은 조선조 왕조사회에서 감히 꿈꾸기 힘든 새로운 생각을 널리 퍼뜨린 인물이기도 하다. “천하는 공물이다.”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것은 왕촉이 한때 죽음에 임하여 한 말이지 성현의 통론은 아니다. 유하혜는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겠는가 하였고, 맹자는 제선왕과 양혜왕에게 왕도를 하도록 권했는데 이들은 성현이 아닌가?” “인생천지간에 누구나 천자가 될 수 있다.” 정여립이 표출한 이러한 생각과 표현들은 당대 사회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었다.

이처럼 왕조시대에 대담하게 왕권의 세습이나 독점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했던 죽도선생 정여립. 그는 시대를 앞선 대담한 의식을 지니고 혁명을 꿈꾸다가 역모로 몰려서 자결로 삶을 마감했고 그가 자결한 직후 그의 가족과 노비뿐만 아니라 그와 교류했거나 알고 지냈던 수많은 호남의 선비들과 그 가족들은 서인들의 모함을 받고 붙잡혀가서 비참한 죽음을 당하게 된다. 천여명의 선비가 죽음을 당했다고 일컬어져서 기축옥사 또는 기축사화로까지 불려지는 이 참사는 처음 정여립의 반역행위에 따른 조사와 문책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선조시절부터 동서로 분당되기 시작한 조정 내부의 권력다툼으로 이어졌고 결국 개인들끼리의 원한이 개입되면서 동인들에 대한 서인들의 보복과 복수의 형태로 진행됐다. 그 결과 정여립이 태어나서 거주했던 전주를 포함한 전라도 지역의 많은 선비들이 정여립과 알고 지냈거나 인척이 된다는 이유로 때로는 단순하게 그와 한두번 편지교류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이처럼 동서분당을 심화시켜서 수많은 선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조선조 후반기 정국의 흐름을 뒤바꾸어놓은 정여립의 역모사건은 어떻게 준비됐고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정여립과 그 가족 및 인척들은 모두 죽음을 당하고 정여립이 남긴 글마저도 모두 불태워졌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파악하기는 힘들다. 단편적이나마 남아있는 자료들은 당시 역모혐의자들에 대한 조사를 담당했던 서인들이 남긴 기록들과 토벌에 나선 서인 쪽 인물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어서 그 객관성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이 사건의 전말에 대해 학계에서도 서로 반대되는 관점으로 논란을 벌이고 있어서 확정된 결론은 나오지 않은 상태이다. 이처럼 조선조 중기에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놓은 정여립의 역모사건은 비록 여러 가지 한계를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빈한한 자료로나마 그 시절을 재구성해보면서 이 사건 내막을 파헤쳐 보고자 한다.


아버지보다 더 강직, 아전들 두려워해
서인과의 이견으로 관직 던지고 낙향

정여립은 문정왕후의 수렴청정과 윤원형의 전횡이 시작되던 1546년(명종 원년) 전주에서 정희증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고려의 무신인 정중부의 태몽을 꾼 후 그를 수태했고 출산하는 날에도 정중부를 만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래서 푸른 빛이 도는 붉은 색의 얼굴을 지닌 정여립은 태어난 후 가족들의 걱정을 사면서 성장했다. 15세가 되었을 때 아전들이 익산현감으로 있던 그의 아버지보다도 정여립을 더 두려워할 정도로 그는 강직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고향인 전주에서 학문적 수양을 쌓은 정여립은 24세가 되던 1567년(선조 원년)에 진사가 되었고 1570년에 식년문과에 2등으로 급제한 후 성균관 정록소에서 정9품의 학유로 관직을 시작했다. 성균관 학유가 된 그는 독서에 전념하면서 이이, 성혼 등과 교류했다. 이 시기에 정여립은 여러 이론들을 잘 종합하여 논변을 잘 하고 총명했기 때문에 다른 학유들의 주목을 받게 됐고 시경에 대한 정확한 고증과 사물의 이름에 대한 정확한 해석으로 차츰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그가 한번 입을 열면 자리를 같이 한 사람들은 말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 이론의 정연함에 감탄하지 않은 이가 없었고 감히 그와 논박을 벌일 엄두를 내지 못했다.

1581년(선조 14년)에 이이 등의 추천을 받아 정언이 된 정여립은 1583년에 예조좌랑이 되었다. 그 무렵 선조는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관원들을 자주 교체하여 관직에 머문 지 몇 개월도 버티지 못하는 관료들이 허다하게 생겨났다. 이에 따라 이이는 정실인사를 금지하고 대간들을 믿고 정사를 맡기도록 주청했지만 선조는 이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조정의 공론이 제대로 정해지지 않아 나라의 정책은 일관성을 잃고 자주 바뀌었다. 개혁적 정책을 주장했던 이율곡, 김우옹 등도 파당의 다툼에 휩쓸려서 더 이상 새로운 정책을 펼칠 수가 없자 병을 칭하면서 관직을 버리고 낙향했다.

1584년 3월에 홍문관 수찬이 된 정여립은 4월에 선조임금에게 “지금 나라일이 어렵고 염려스러운데 안으로 사류들이 환산하고 밖으로 싸움이 곧 일어나려고 하니 신같이 어리석고 재빠르지 못한 사람이 그 직을 수행하기에 만에 하나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걱정 되옵니다”고 당대 정세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선조는 “제가 스스로 그 직을 맡기에 힘들다고 상소하였으니 교체하라”고 하여 그는 하직하고 고향인 전주로 돌아왔다.

그 후 1년이 지난 1585년 4월 조정에서 성혼, 이이 등과 서인들에 대한 공격이 날로 심해가고 있을 때 정여립은 이발 등 동인들의 강력한 추천을 받아 홍문관 수찬에 다시 임용되었다. 조정에 다시 들어온 정여립은 경연에서 “박순은 간사한 무리들의 괴수이고 이이는 나라를 그르친 소인이며 성혼은 간사한 무리들의 편을 들어서 상소를 올려 임금을 기망하였습니다. 호남은 박순의 고향이고 해서는 이이가 살던 곳이니 그 지방 유생들의 상소는 모두 두 사람의 사주에 의한 것으로 공론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신이 도성에 들어와 성혼을 찾아가서 간인들을 편들어서 임금을 기망한 죄를 질책하면서 이이와 절교하였다고 말하니 성혼은 이의 없이 죄를 자복하였습니다.”하고 선조 앞에서 박순과 이이를 공격했다. 정여립의 주청에 대해 선조가 그 내용을 달갑게 여기지 않자 그는 엎드려서 “신이 지금부터 다시는 천안을 뵐 수 없겠습니다”라고 말하고 물러났다.

그 직후 경연에서 죽은 이이를 공격한 그의 행위에 대해 의주목사 서익은 ‘정여립이 이이 생전에 율곡을 성인으로 칭하였다가 이제 그를 나라를 잘못 이끈 소인으로 매도하는 것은 스승을 배신한 처사’라며 상소했고 이이와 성혼의 문도들이 주축을 이룬 서인들도 정여립에 대한 비판의 상소를 올려 그를 공격하였다. 이에 대해 정여립이 이이와의 사제관계를 부인하면서 “이이 생전에 이미 그와 절교하였다”고 말했다.

왕에게 미움 사 복직 못하고 낙향, 후진 양성하며 조정 세력과 교류

정여립의 이러한 주장에 이이의 조카인 이경진이 정여립이 이이에게 보낸 편지를 공개했는데 이 편지를 1583년 9월에 쓴 것이라고 하여 조정에서는 누구 말이 옳은지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게 일어났다. 이에 선조가 서인들의 편을 들어 정여립을 ‘송나라 형노같은 인물(스승을 배반한 제자)’로 말하면서 비판했고 이후 이발 등이 그를 계속 천거했지만 선조는 두 번 다시 기용하지 않았다.

이이와 정여립은 나이차가 10여세 밖에 나지 않았고 또한 이경진이 제시한 편지에서 정여립은 이이를 스승이 아니라 그냥 ‘존형’으로 표현하고 있어서 그 둘은 사제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선조가 서인들의 비난을 사실로 받아들여 그를 ‘스승을 배반한 제자’로 규정함으로써 그는 왕의 미움을 받고 관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그 이후부터 정여립과 정치적 견해를 달리했던 서인들은 그를 ‘스승을 배반할 정도로 행동의 앞뒤가 의심스러운 믿을 수 없는 사람’으로 비판했다.

이 무렵 서인들의 논변은 송익필, 송한필 형제가 주도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지모에 있어서 제갈공명에 비견될 정도로 뛰어나 서인들의 핵심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당시 송익필은 뛰어난 지략과 학식으로 많은 사람들과 교류를 하고 있었고 정엽, 조헌 등 대사간을 지낸 문객들이 있을 정도로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고 있었다. 그때 송한필에게 1584년 7월 그의 죄를 묻는 사건이 발생했다. 송한필의 사돈인 곽사원과 황유경의 노비 거인 사이에 방죽을 막는 일로 일어난 송사사건이 그 무렵 곽사원에게 유리한 판결이 난 것이다. 10여년동안 이끌어온 이 판결에 대해 정언지는 곽사원이 문서를 위조하였는데도 유리한 판결이 난 것은 곽사원과 사돈간인 송한필이 후원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논란이 벌어지자 곽사원 집안과 거인 집안이 모두 변방으로 강제 이주당하는 벌을 받게 되었고 송한필도 이 송사에 가담한 죄로 벌을 받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송사에 함께 참여했던 정철 등 서인들은 큰 타격을 받게 된다.

한편 서인들의 집중적인 공격과 왕의 미움을 받고 관직을 물러나 고향으로 내려온 정여립은 동인들과 긴밀하게 교류하면서 향촌에 있는 후진세력들을 키우는데 전념했다. 그러나 비록 그가 조정에서 물러나 있었지만 조정에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김우옹 등 동인들과 계속 교류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정 관료의 인사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또한 사림에서도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자 그와 교류하고자 하는 인물들이 그의 문하에 많이 모여들어 그는 전라도 인근에서 어느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위치에까지 올랐다.
이 시기 선조의 우유부단한 정국운영과 관료들의 관직다툼으로 조정은 어려운 민생은 제쳐두고 극심한 대립만을 빚어가면서 극단적인 파당싸움으로 치닫고 있었다. 조선조 역사에서 파당의 시발점이 된 당쟁은 처음 이조전랑이라는 관직다툼에서 출발했다. 1572년(선조 5년) 대궐 동쪽인 건천동에 살던 김효원과 대궐 서쪽인 정릉동에 살던 심의겸 사이에서 이조전랑의 자리를 두고 일어난 사사로운 감정다툼은 더욱 격렬해져서 서로 지지하는 세력에 따라 파당을 이루면서 동서로 나누어지게 된다.

김효원의 주장에 동조했던 무리들은 동인을 이루었고 심의겸에게 동조하는 무리들은 서인을 형성했다. 동인은 그들의 영수로 허엽을 서인은 그들의 영수로 박순을 모시고 조정에서 논의하는 안건마다 사사건건 시비를 벌였다. 이이는 중간 입장에서 조정공론을 조정하였는데 당시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동인들에게서 서인을 편든다고 비판을 받자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가 버렸다. 동서파당간에 조정역할을 했던 이이가 관직을 그만둔 다음해에 죽음을 맞이하자 당쟁은 더욱 치열하게 전개됐다. 당시 조정에서는 성혼과 이이의 공과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었는데 성혼과 이이를 배척하거나 공격하는 대신들은 동인에 속했고 성혼과 이이를 높이려는 대신들은 서인에 속했다.

‘천하는 公物’임을 주장하며 대동계 조직해 거사 꿈꾸는데

동서로 분당이 된 조정에서는 대신들끼리 서로 모함하고 비난하면서 국정을 소홀히 하는 바람에 탐관오리들이 들끓었고 국가재정도 고갈됐다. 게다가 연이은 흉년으로 인해 굶어죽은 시체가 들녘에 널려있었고 곳곳에서 굶주린 백성들이 도적이 되어 민란을 일으키는 등 어수선한 정국이 계속됐다. 또한 변경의 북쪽지방에서는 여진족들이 수시로 침범하여 소란스러웠고 남쪽에서도 왜구들이 불시에 침범해 많은 백성들이 고통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탐학에 시달린 백성들 사이에서는 새로운 인물과 세계에 대한 갈망이 더욱 높아져만 갔다.

고향으로 내려온 정여립은 1586년 고향에서 가까운 진안에 있는 죽도(竹島)에 서실(書室)을 지어놓고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했다. 그가 결성한 대동계에서는 계원들을 신분과 지위에 차별을 두지 않고 사람들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당시 나라 정세에 비판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신분 차별을 받던 서얼과 승려들이 많이 참여했다.

정여립은 대동계원들을 매달 15일마다 진안의 천반산에 모아놓고 무술 및 군사 훈련을 시켰다. 대동계원들은 평시에 농사를 짓거나 살림을 하면서 지내다가 매달 보름이 되면 천반산 아래 모여 깃대봉에 ‘대동’이라는 깃발을 꽂아두고 정여립의 지휘 아래 뜀바위를 뛰어넘는 훈련과 궁술교육 등을 받았다. 대동계원들은 신분과 직위에 차별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하층민으로 천대받았던 사람들 중에서 무술이 뛰어나거나 재능 있는 인물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이들 중에는 길삼봉과 정팔용과 같이 무술에 뛰어난 인물과 운봉의 승려 의연, 도잠, 설청과 해주의 지함두 등 학식과 능력이 특출한 인물들이 포함돼 있었다. 이들은 정여립의 주장에 크게 공감하면서 그와 함께 새로운 세계를 열고자 했다.

그 무렵 정여립은 노자와 장자 및 주역에 심취해 ‘은(殷)나라의 탕왕이 하(夏)나라의 걸왕을 내쫓고 주(周)나라의 무왕이 은(殷)나라의 주왕을 쳐서 내쫓은 것은 하늘에 순응하고 사람의 뜻에 부응한 것이다’라는 말에 크게 공감했다. 또 여씨춘추(呂氏春秋)에 나오는 ‘천하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요, 천하의 천하이다’라는 뜻에 공감해 “천하는 공물(公物)”임을 주장하게 된다.

한편 그는 주역을 해석하면서 나라의 운세를 파악해본 결과 경인년(1590년)과 임진년(1592년)에 큰 난리가 일어나며 자신의 운세는 그 때가 가장 길할 때임을 알고 그 시기에 맞추어서 거사를 일으킬 꿈을 꾸게 된다. 특히 정여립의 아들인 옥남이 태어날 때 등에 왕(王)이라는 글자 무늬를 띠고 있었고 두 어깨에 사마귀가 일월형상으로 박혀 있었기 때문에 그는 아들이 새로운 세계의 영도자로 태어났다고 믿게 된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학문적 자질이 뛰어났고 예사롭지 않은 담력과 재주로써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한 아들 옥남은 아버지에게서 장차 새로운 세계를 이끌 인물로서 갖춰야할 덕목들을 배우면서 성장했다.

한편 정여립은 자신을 따르던 승려 의연과 도잠, 설청 등과 함께 황해도에 가서 구월산 등 여러 산들을 둘러보면서 앞으로의 계획을 논의했다. 그는 거사를 하기 위해서는 우선 각지에서 민심이 먼저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와 관련한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 각계각층의 사람들과 광범위한 친분관계를 유지했고 선조의 실정에 반발한 백성들이 크게 일어나 민심이 동요되기를 기대했다.

1586년만 해도 황해도와 전라도에 큰 가뭄이 들어 기근이 더욱 심해졌고 병충해마저 극심해 굶주리는 백성들이 곳곳에서 유리걸식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랑캐와 왜구 침입까지 빈번해지자 백성들은 국정에 대한 불만을 공공연하게 늘어놓기 시작했고 민심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급기야 1587년 2월에 왜군들이 왜선 18척을 이끌고 와서 전라도의 손죽도(損竹島)와 선산도(仙山島) 일대에서 조선 수군과 전투를 벌이고 민가에 들어와서 불을 질렀으며 수백명의 백성들을 살육하거나 포로로 붙잡아가는 정해왜변이 일어난다.  

‘이씨 망하고 정씨 일어난다’고 퍼뜨려
백성구제·차별철폐 내세워 민심 부추겨

대규모 왜군의 침입으로 수세에 몰린 각 지방에서는 전주부윤(全州府尹)에게 도움을 요청하였고 각 지역의 수군과 관군만으로 이를 막기가 힘들다고 생각한 전주부윤 남언경(南彦經)은 정여립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전주부윤의 요청을 받은 그는 훈련된 대동계원들과 관군을 몇 개의 부로 나누어서 재편성한 후 각기 영장을 지정하여 지휘하도록 했다. 이때 각 부의 영장들은 모두 대동계원들이었다. 정여립은 새로 편성한 군사들을 이끌고 가서 침입한 왜구를 격퇴한 뒤 귀향했다. 전주에 돌아온 대동계원들은 다시 일이 생길 때 연통하여 모일 것을 약속하고 모두 해산하여 집으로 돌아갔다.

이후 정여립은 대동계의 조직을 전국으로 확대시키기 위해 변숭복, 지함두, 의연 등을 각지로 보내 능력 있는 자들을 포섭토록 하면서 ‘정감록’의 참설(讖說)을 이용하여 ‘망이흥정설(亡李興鄭說)’을 퍼뜨리도록 했다. 그와 함께 자신을 따르던 길삼봉과 정팔용을 데리고 각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민심의 흐름을 살펴보고 의연과 지함두 등을 해서지방으로 보내 정감록 같은 비기 등과 풍수지리설을 이용해 민심을 선동하였다.

그 결과 1589년에 접어들면서 해서지방에서는 ‘호남의 전주지방에 성인이 일어나 우리 백성을 구제할 것이며 땅과 바다에서 노역을 하거나 잘못하여 쫓기는 자들도 사면 받고 공인과 사인, 천민 등의 신분차별도 모두 혁파되어 이로부터 나라가 태평하고 무사할 것이다’라는 참설이 널리 퍼져나갔다.

한편 조정에서 큰 세력을 형성하게 된 동인들은 서인의 핵심역할을 하는 송익필과 한필 형제를 끊임없이 공격하면서 그들의 약점을 찾고자 하였다. 그 결과 이들 형제의 신분에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된 동인들은 신분재판을 벌여 송익필, 한필 형제를 비롯하여 감정의 자손 70여인을 천민으로 환천시켰다. 양반 가문에서 졸지에 천민 신분으로 전락한 이들 형제는 이제 동인들의 추적을 피해 서인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된 것이다.

서인의 지략꾼인 송익필, 한필 형제가 양반에서 천민으로 전락하게 된 과정에는 안당 집안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안당(安塘 1460~1521)의 아버지인 돈후는 형의 노비인 중금을 첩으로 맞아들여 감정이라는 여자 아이를 낳았다. 감정은 송린에게 출가하여 사련을 낳았다. 송사련은 재간이 많고 총명하여 안씨 집안에서 크게 신임을 받게 된다. 1521년 안처겸은 아버지인 안당이 기묘사화로 인해 관직을 삭탈당하게 되자 크게 불만을 갖고 있던 차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모친상으로 외가에 머물던 안처겸은 친구들과 담론을 하는 자리에서 대신인 심정과 남정 등이 조정에서 일을 그릇되게 하고 있으니 이들을 제거해야만 나라가 제대로 된다는 말을 하게 된다. 마침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송사련은 안처겸이 대신들을 모함하여 죽이려 한다고 고변했고 남정 등은 이를 역모로 확대시켜 안씨 집안은 멸문이 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송사련은 밀고를 한 공로로 안씨 집안의 저택과 노비들까지 하사받고 첨지를 거쳐 판관벼슬까지 지냈으며 80살까지 살았다. 송사련의 5남 1녀가 되는 자식 중에서 송익필은 어릴 때부터 뛰어난 문필을 갖추어서 성혼, 이이 등과 친밀하게 교류하였고, 이산해와 더불어서 8문장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송익필, 한필 형제에 대해 동인들은 그들의 행적을 주목하면서 집안가계를 세밀하게 조사했고 그 결과 이들의 아버지 송사련의 밀고행위와 함께 그 과정이 구체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이에 동인들은 안당의 첩실 자식인 안윤(安玧)을 앞세워 소송을 제기했고 그 결과 당시 대단한 권력들을 행사하던 송익필을 비롯한 감정의 자손들 70여명이 천민으로 전락했다. 천민으로 전락한 이들 형제는 형관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어 성혼, 김장생, 정철 등의 도움을 받으면서 이름을 바꾸고 해서지방에 숨어살면서 자신을 천민으로 만든 동인들에 대한 원한을 가슴 깊게 품게 된다.

동인에 한 품은 송익필 형제
계책 꾸며 선조에게 고자질

신분전락으로 인해 죽음의 구렁텅이에 빠진 송익필과 한필 형제는 동인들에 대한 혈원을 품고 황해도로 갔다. 이곳에서 이름과 성을 바꾸고 점술가로 행세하면서 황해도 지방의 향반들을 유혹하여 관상과 사주를 보아주고 조상의 묘 자리를 알려주곤 했다. 이 무렵 송씨 형제가 숨어 지내던 황해도 지방에서는 ‘전주지방에 성인이 일어나 우리 백성을 구제할 것’이라는 참설이 널리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 풍문을 들은 송익필과 한필 형제는 전주에 사는 정여립이 그 풍문의 주인공임을 알고 이를 이용해 조정에서 동인들을 몰아낼 계책을 세우게 된다. 형제는 예전에 선조에게 정여립의 등용을 강력하게 주청한 바가 있었을 만큼 어느 정도 그의 강직한 성품을 알고 있었다. 그는 박식하면서도 성품이 과격해 선조의 우유부단함을 자주 비판했고 언젠가는 경연 후 밖으로 나오면서 선조가 있는 쪽을 향해 눈을 부릅뜰만큼 강직한 기질이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이용하고자 한 것이다. 송한필 형제는 이러한 풍문을 이용해 정여립의 대동계 활동을 구체적인 역모활동으로 꾸며서 그과 함께 자신들을 공격한 이발 등 동인들을 사지로 몰아넣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송한필은 조생원으로 성과 이름을 고치고 황해도 이곳저곳의 주막에 다니면서 ‘전주에 성인이 났으니 즉 정수찬이다. 길삼봉과 서로 친하게 왕래하였는데 삼봉은 하루 삼백리 길을 걸으며 지혜와 용맹이 비할 데 없으며 신인이어서 사람들이 만일 그를 보게 되면 벼슬이 저절로 오게 될 것이다’라는 풍문을 널리 퍼뜨렸다. 동인들에 대한 복수만을 생각하던 송익필과 송한필 형제들은 정여립에 대한 풍문을 널리 퍼지도록 한 후 그를 주축으로 동인들을 한꺼번에 역모혐의자들로 만들면 자신들의 한 맺힌 원한을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황해도 백천은 송씨 형제의 고향이었고 이곳에는 그들을 도와줄 서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어서 활동하기에 유리했다. 송익필은 황해도 악악지역에서 활동하는 대동계원들 중에서 정여립의 제자임을 자처하는 인물인 조구와 승려 의암을 주목했다. 특히 조구는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면서 입을 가볍게 놀려 머무는 곳마다 새 세상이 곧 올 것처럼 떠들고 있었고 항상 많은 무리들과 어울려서 지내고 있었다. 송익필은 같은 서인이었던 안악군수인 이축에게 이들의 행적을 알려 조사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안악군수 이축은 조구와 의암을 붙잡아 문초하고 조구의 집을 조사하니 정여립과 교류한 편지가 집안에서 나왔다. 이를 바탕으로 하여 이축은 재령군수인 박충간과 상의한 후 신천군수 한응인과 더불어 감사인 한준에게 보고했다. 한편 재령군수 박충간도 재령에서 대동계원인 이수를 붙잡아 문초하니 이축과 같이 거사를 모의한 것으로 자백했다. 이처럼 송익필은 안악에서 대동계원으로 활동하던 조구와 승려 의암의 행위들을 조사하도록 하여 이들의 활동을 역모활동으로 고변토록 했다. 한편 송익필은 안악에 사는 대동계원인 변숭복을 찾아가서 정여립의 대동계 활동이 역모로 고변되었음을 알려주면서 역도로 몰려 죽지 않기 위해서는 그를 붙잡는데 협조하도록 설득했다. 송익필은 말에 설복당한 변숭복은 그의 지시대로 먼저 서인의 거두인 성혼의 문인으로 당시 진안현감으로 있던 민인백을 찾아가서 정여립을 생포할 계책을 세우게 된다.

한편 1589년 10월 2일 황해도 관찰사 한준과 재령군수 박충간, 안악군수 이축, 신천군수 한응인 등은 정여립의 역모혐의를 담은 비밀장계를 선조에게 올리게 된다. 선조가 받아본 이 장계에는 ‘전직 수찬인 정여립이 모반을 꾸미고 있다는 내용과 함께 역적들이 장차 금강을 건너 한강에 이르고 연로 봉수와 역졸들의 왕래를 끊어 궁궐을 범할 계책을 세우고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장계를 본 선조는 곧바로 편전에 나가 삼공과 육승지, 의금부 당상관들을 급히 들어오게 하고 숙직하던 총관과 옥당 상하 번들도 모두 입시케 하여 긴급회의를 하였다. 이때 정여립의 생질인 이진길만은 들어오지 않도록 했다.

변숭복의 배반으로 포위된 뒤 자결
가족 교살되고 인척 전주서 쫓겨나

정여립에 대한 역모고변으로 긴급히 이루어진 이 회의에서 대신들은 시급히 전라도와 황해도에 선전관과 금부도사를 파견토록 주청했고 선조의 내락이 내려졌다. 금부도사 유담이 전주부윤에 이르러서 정여립의 집을 찾아갔지만 정여립은 이미 어디론가 출타하고 집에 없었다. 그의 행방을 찾지 못한 금부도사 유담은 그가 도주했다고 급보로 조정에 보고했고 10월 7일 급보를 받은 조정은 정여립에 대한 체포령을 내리게 된다. 한편 황해도 관찰사 한준의 고변이 있은지 일주일이 지난 10월 11일 정철은 선조를 배알하고 이 사건의 전말에 대한 비밀보고서를 올린다. 그 결과 선조는 14일 독포어사 정난우, 이대해, 정숙남을 삼남지방으로 파견했다.

한편 변숭복은 해주를 출발해 곧바로 진안으로 갔다. 본래 날래고 발이 빨라 황해도와 전라도를 왕래하면서 정여립에게 여러 정보를 전달해주었던 그는 진안에 도착해 진안현감 민인백과 만나 정여립을 유인해 죽일 계획을 세우게 된다. 이에 변숭복은 죽도서실로 찾아가서 정여립과 하루 동안 같이 지낸 후 민인백과 약속한 죽도의 한적한 장소로 그를 유인했다. 이날 역모로 고변된 사실도 모른 채 아들 옥남과 함께 변숭복을 따라 죽도의 한 마을에 도착한 정여립은 뒤늦게 200여명의 관군들이 자신들을 포위하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의아심을 품은 그가 변숭복을 추궁하여 관군이 철통같이 자신들 일행을 포위하고 있는 이곳으로 속아서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살아남기가 힘들다는 것을 깨닫은 정여립은 옆에 있던 변숭복을 칼로 쳐서 죽인 후 어두워가는 하늘을 우러러 보며 크게 울부짖고나서 자결했다. 민인백은 죽은 정여립과 변숭복의 시신을 수거하고 정여립의 아들 옥남 및 수행원 박춘룡을 붙잡아서 전주로 압송했다. 다음날 15일 이 둘의 시신을 실은 수레는 포박된 정여립의 아들 옥남 및 박춘룡을 실은 수레와 함께 전주감영을 출발해 서울로 운반됐다.

서울에서의 역모사건 조사는 서인의 중심인물로서 위관이 된 정철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우의정으로 위관이 된 정철은 성혼과 긴밀히 상의하면서 이 기회에 동인들을 모두 제거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사건에 대한 조사에서 정여립은 자결했기 때문에 역모를 인정한 것으로 판결하고 붙잡혀온 정여립의 가족들과 친척, 친구들과 대동계원들을 고문하기 시작했다. 15일에는 황해도에서 잡혀온 대동계원 이기와 이광수 등을 고문해 자복받은 후 처형했고 17일에는 악안의 수군인 황언륜과 방의신을 고문하여 자복받은 후 처형했다.

선조가 임석한 가운데 열린 10월 19일 국청에서 17세인 옥남은 길삼봉이 모주이고 해서인인 김세겸, 박연령, 이기, 이광수, 박문장, 변숭복 등이 가끔 왕래했으며, 승려 의연과 도사 지함두가 죽도의 서당에 머물면서 공모하였다고 자백했다. 이어서 문초를 받은 이광수, 박연령, 지함두 등의 공초는 대체로 고변을 한 조구의 말과 같았다. 붙잡혀온 이들 중에서 정홍, 방의신, 황언륜, 의연 등은 자백했지만 이진길, 정여복 형제와 한경, 송간, 조웅직, 신여성 등은 불복하다가 장형을 맞고 죽었다.

위관들은 정여립을 ‘모반대역죄’를 지은 죄인으로 판결했고 27일 그의 시체는 조정백관들이 보는 앞에서 능지처참됐다. 또한 정여립의 부모와 아내 및 자식들도 모두 붙잡혀와서 교살됐고 그의 첩과 노비들은 정여립 일행의 나포에 공이 많은 진안현감 민인백 등 공신들에게 하사되어 그들의 소유가 됐다. 또 정여립이 살던 집은 파서 연못으로 만들었고 ‘전주는 조종(祖宗)의 어향(御鄕)이니 전주에 있는 정여립의 조부 이상의 분묘를 낱낱이 파내어 그 족인들로 하여금 이장하도록 하고, 그와 멀고 가까운 집안들도 모두 전주에서 멀리 떨어진 다른 고을에 가서 살도록 하라’는 선조의 지시에 따라 정여립과 조금이라도 인척이 되는 집안들은 모두 전주에서 먼 지방으로 쫓겨났다.  

“기축옥사 이후 조선 조 정치 환경
진보 후퇴하고 보수 방향으로 전개“

서인의 지략가로서 이 사건을 뒤에서 조종했던 송익필은 동인이었던 정여립과 그 가족들의 죽음으로만 끝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정철의 집에 유숙하면서 성혼 등 서인들과 접촉을 하고 있던 송익필은 이 기회에 원한이 많은 이발 등 동인들을 한꺼번에 말살시키고자 했다.
송익필은 정철을 빨리 입궐토록 하여 위관으로 임명받도록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호남 유생인 양천회를 통해 이 사건에 중립적이었던 우의정 정언신과 동인들 여럿이 정여립과 관련을 맺고 있다는 상소를 올리도록 했다. 송익필의 부탁을 받은 양천회는 11월 3일 이발과 이길, 김우옹, 백유양, 정언신, 최영경 등이 정여립과 친분을 맺고 모의했다는 상소를 올리게 된다. 양천회 등의 상소와 정철의 주청으로 인해 정여립과 친분이 있는 많은 선비들이 줄줄이 붙잡혀왔고 심한 고문을 받은 후 죽음을 당했다.

맨 먼저 송익필과 대립했던 이발이 정여립과 친밀했다는 죄목으로 붙잡혀 와서 온몸에 살이 온전한 곳이 없을 정도로 가혹한 고문을 받고 죽었다. 또 이발의 동생 이호도 고문을 받은 후 유배당했다가 다시 잡혀 와서 장형을 맞고 죽었다. 이발이 죽은 후 그의 늙은 어머니와 어린 아이들도 붙잡혀 와서 모두 압사형을 받았다.

12월 3일에는 참봉 한백겸이 정여립의 시신을 염해주었다가 장살 당했다. 그리고 당시에 우의정이었던 정언신도 유생 양천회의 상소와 양사의 탄핵으로 유배당했고 그의 아들 률(慄)은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보고 식음을 전폐한 후 굶어죽었다. 또 정개청도 정여립과 친밀하였다는 이유로 붙잡혀 와서 고문을 당한 후 경원의 아산보로 귀양 갔다가 1590년 7월에 죽었다. 정철을 소심한 소인으로 비판했던 영남 출신인 최영경도 심문을 받고 죽었다. 이들 이외에도 100여명이 넘는 선비들이 붙잡혀와서 고문을 받고 죽음을 당했다.

기축년(1589년)에 벌어진 이 옥사를 처리함에 있어서 서인인 정철과 성혼, 송익필 등은 자신과 개인 감정이 있는 동인들을 모두 정여립과 관련시켜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정철은 이전부터 독선적으로 행동하고 여자와 술을 좋아하며 술자리에서 실수를 하는 경우가 많아 호남 출신임에도 호남의 일부 유생들한테는 소인배로 많은 비난을 받고 있었다. 그는 항상 이를 원통하게 여겼는데 위관으로서 이 사건을 처리할 때 이러한 개인 감정을 덧붙여서 겉으로 관대한 듯 하면서 뒤에서는 살육을 교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철은 판결에 있어서 서인의 거두인 성혼과 상의해 이 사건과 아무 관련도 없는 많은 호남 유생들을 동인이라 하여 정여립과 관련시켜 죽였고 그 바람에 사림에서 존경받던 많은 호남의 인재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3년여 동안 계속된 기축옥사로 인해 이 사건과는 아무 관련도 없는 무수한 사람들이 수없이 죽음을 당했고 조정에서는 관료들끼리 서로 의심하여 한 마디 말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또한 사림에서도 글 한 줄 올바르게 쓰기가 두려운 분위기가 조성됐고 동인과 서인들은 전보다 더 극단적으로 대립했다.

이 사건의 처리 과정에서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호남의 인물들은 천여명에 이르렀고 그 결과 이 사건은 호남지방의 진보성향을 가진 선비들이 모두 희생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사건으로 인해 학문적으로는 노장적인 성격을 지닌 남명의 후계자들과 개혁 지향적인 서경덕의 후계자들이 대거 희생당했다. 지역적으로는 기호지역에 사는 서인들인 이이 후학들이 가해자가 되고 호남지역에 많았던 개혁적인 동인들은 피해자가 되었다. 또 호남의 사학들은 전남 담양의 창평이 고향인 가해자 정철로 인해 분열되는 양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 사건 이후 조선조 조정은 진보적이고 진취적인 인물들과 기상이 사라지면서 보수적이고 수구적인 방향으로 나아갔기 때문에 이 사건은 조선조 정치 환경을 후퇴시켰고 이후 곧바로 아무런 대비 없이 임진왜란을 맞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끝>




                내륙의 섬 죽도             출처: 전북 진안군청 홈페이지
죽도, 결국은 섬이었구나

진안에서 무주를 향해 약 8km를 달리면 상전면 수동리 내동마을이 죽도에 이른다. 꺾아 세운 듯한 바위산 절벽을 맑디 맑은 물이 한바퀴 휘돌아 흐르고 있기에 마치 섬과 같았던 곳.

남쪽의 장수에서 흘러오는 연평천과 동쪽 무주 덕유산에서 시작되는 구량천이 파자형(巴字形)으로 굽이굽이 굽이쳐 합류하면서 이룬 장관이다.

산죽(山竹)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죽도..그러나 이름처럼 섬이되고마는, 또 하나의 전설이 현실로 맞춰지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정여립과 죽도

죽도를 빼어난 경관의 장소로만 기억해서는 안된다. 이곳은 정여립의 최후가 기록되어 있는 곳 이기 때문이다. 1589년 기축년 선조때이다.

무려 천여명에 달하는 희생자를내는 옥사(獄事)인'기축옥사'의 주인공이며 그후, 우리의 호남땅을 반역 향으로 전락시켜 차등의 한 획을 더했던 일대 사건의 마지막을 기록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재조명되어야 할 역사

그러나 정여립은 역적이 아니었다. 한창 재조명되고 있는 학계와 일부 향토사학자들의 노력에 의해 점차 그 진실을 위한 재조명이 진행되고 있듯이 정여립은 결코, 죽도로 도망 했던게 아니었다.
평소 죽도를 자주찾아 '죽도 선생'이라고도 불리웠던 그가 왜 피신처로 죽도를 택 했을까? 아니다.
정여립은 역적이 아니었고 또 도망칠 이유도 없었으며 평소처럼 죽도에 놀러왔다가 죽임을 당 한것 이었다. 그리고 역모를 인정 했던 것처럼 꾸며 결국은 자살을 한 것으로 위장되었던 조작극이었다는 '동서만록'의 기록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천반사의 전설

 
진안군 관광안내도
 






죽도엔 정여립과 관련된 전설이 하나 있다.
천반산 정상에 있다는 거대한 돌 솥 이야기이다. 정여립이 많은 부하들과 이용했으며 그 크기가 어찌나 크던지 솥전 난간으로 젊은 장정들이 뛰어다녔다는 전설이다. 하지만 전설로만 치부하여 무관심 해서는 안된다. 언제고 일부러라도 시간을내어 천반산의 정여립성터를 찾아야 한다. 우리들의 무관심으로 행여 영원히 찾지 못할지도 모를 돌솥을 잊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천혜의 피서지

이곳의 역사를 기억해야 하나 그것을 가지고 이 천혜의 피서지를 숙연하게만 지나칠 수는 없다.
하늘과 물과 노래와 바위산과 나무가 조화의 극치를 이루는 절경. 보는 이 마다 넋을 잃게 만드는 천혜의 관광지이다. 정여립이 칩거했다는 찬바람 나오는 송판서굴, 전설의 형제바위 등, 얼마 전가지 만해도 천연기념물이었던 쏘가리가 넉넉히 잡힌 곳이기도 하다. 머지않아 수많은 사람들이 이젠 진짜 섬이 된 죽도를 찾으며 옛날, 섬이 아닌 죽도를 더 그리워 할 지도 모를 일이다. 섬이 아니었던 옛날 이야기를 때를 잘못 만난 정여립의 이야기를 후손들에게 귀한 전설처럼 이야기하며 말이다.

위 치 : 진안군 상전면 수동리 내송마을

교통편
진안 - 상전 - 죽도 (08:10, 09:20, 12:40, 15:30, 18:00, 19:20)
죽도 - 상전 - 진안 (07:40, 09:40, 11:50, 13:00, 15:40, 18:20, 19:40)

운행거리 : 약 12km



진안군청 문화관광과 ( 063-430-2227 )




  0
3500
16 [이사람] “5월의 기억…영화와 다른 감동 선물” 임성래 2010-04-22 2971
15 12월 1일(화) 7시 서울 아르페지오 클래식 기타 연주회 고정석 2009-11-19 13634
14 김동현 동문 국악연주 동영상 outsider 2009-05-07 3751
13 디즈니 감독들의 창의력 비결 김훈종 2007-10-01 4617
12 추사 김정희 서거 150주기 특별전(www.choosa.or.kr) 김태룡 2007-01-14 4251
11 원교와 창암 글씨에 미치다 [2] 최준호 2005-06-30 4632
10 Re..원교와 창암 글씨에 미치다 김태룡 2005-06-30 4211
9 정여립 사건의 진상 김태룡 2005-04-30 4833
8 15-18세기 韓國思想文化 강좌 개최 최준호 2005-03-04 4088
7 古建築 香氣 김태룡 2005-02-13 3860
6 윤석화의 <위트>를 봤어요. 김태룡 2005-02-12 3684
5 박규 이야기...(펌) 범희변 2004-09-04 23862
12